오드리햇반's Life story
알론조 모닝 프로필 나이 키 프로필 포지션 센터 국적 성적 기록 본문
골밑의 전사, 알론조 모닝
- 2018. 8. 21
1990년대 NBA를 수놓았던 센터들로서 거론되는 선수들이 주로 하킴 올라주원, 패트릭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 샤킬 오닐이다. 저마다 커리어 평균 20득점 및 10리바운드 근처의 드높은 숫자를 기록했던 위대한 센터들이랍니다.
이에 비해 비슷한 시대를 거친 또 다른 센터 알론조 모닝에 대한 조명은 약한 감이 있다. 커리어 평균 17.1득점 및 8.5리바운드로 숫자 덩치도 작았고 치명적 질병이라는 불운으로 인해 빛났던 시기도 짧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균 21.5득점 10.1리바운드 3.1블록을 기록했던 모닝의 첫 8시즌 커리어는 비교적 짧긴 하지만 간과할 수 없을 만큼 빛나는 시기였다. 특히 모닝은 유달리 저돌적인 몸싸움들을 보이면서 큰 인기를 구가했ㄷㅂ니다.
이에 신장 질환으로 인해 커리어에 큰 위기가 오기 전까지 모닝의 활약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오닐과 함께 시작한 NBA 커리어
1992년 NBA 드래프트 1순위가 오닐이고 2순위가 모닝이었다. 오닐은 대학 3학년을 마쳤음에도 20세였고 4학년을 마친 모닝은 22세였다. 게다가 216cm의 장신을 가진 오닐이 208cm의 모닝에 비해 센터로서 더욱 큰 장래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기대대로 오닐은 역대 최고의 NBA 센터 대열에 들 만한 성과를 쌓아갔다. 신인 시즌부터 56.2% 야투율로 평균 23.4득점 13.9리바운드 3.5블록을 기록하기도 했다. 1992~93시즌 신인상 투표에서 오닐은 98표 중 96표를 받았답니다.
이런 오닐에 비해 나머지 2표만 받은 모닝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비교를 떠나면 모닝의 숫자는 충분히 대단했다. 51.1% 야투율 평균 21득점 10.3리바운드 3.5블록이었다.
베테랑에게도 엘리트 기록인 평균 20득점 10리바운드를 달성했던 역대 NBA 신인은 20명뿐이다. 모닝 이후로는 팀 던컨, 엘튼 브랜드, 블레이크 그리핀만이 달성해봤다. 여기에 평균 3블록 이상도 추가 조건으로 붙이면 역대 단 3명만 남는다. 로빈슨, 오닐, 모닝이다.
▶드높진 않았지만 꾸준히 유지한 평균 20득점 대역
흔히 4대 센터로 불리는 올라주원, 유잉, 로빈슨, 오닐에 비해 유독 모닝이 가려진 부문이 득점일 것이다. 저 네 명의 센터들은 각자 평균 27득점을 넘겨보기도 했고 리그 평균 득점 순위에서 수위권 안에 들었다. 로빈슨과 오닐은 평균 득점 리그 선두에 올랐던 적도 있답니다.
이에 비해 모닝은 최고 순위가 1995~96시즌의 7위(23.2득점)였다. 그때를 제외하면 평균 19.2득점과 21.7득점 사이의 대역이었다. 그래도 한 팀의 에이스로서 나서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2년차 1993~94시즌부터 8년차 1999~00시즌까지 1996~97시즌을 제외하고 매번 팀의 득점 선두였다.
3년차까지 샬럿 호넷츠에서 함께 뛴 래리 존슨과 4년차부터 마이애미 히트에서 함께 한 팀 하더웨이를 통해 모닝은 평균 40득점 가까이 합작해내는 듀오를 형성했다.
득점 측면에서 모닝은 림 근처에서 수비를 앞에 두고 처리하는 능력에 있어 4대 센터들보다 평가가 낮을 수 있다. 수비를 곁에 둔 손끝 마무리에서 보다 좋은 결과를 보여준 4대 센터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닝은 수비와의 몸싸움을 통해 충분히 좋은 결과를 끌어냈다. 강인한 체격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렵함도 겸비해 느린 센터에게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여기에 가볍게 올라가는 점프슛도 있었습니다.
커리어 838경기들 중 30득점을 55회 넘겨 본 모닝의 최고 경기 득점은 1995~96시즌 3월29일(이하 현지시각) 워싱턴 불릿츠 상대 50득점이었다. 당시 워싱턴에는 231cm 리그 최장신 조지 뮤레산과 216cm 신장 짐 맥클베인이 각각 센터로 나섰지만 모닝의 힘과 날렵함을 앞세운 플레이에 속절없이 당했다.
▶커리어 막판까지 유지된 막강한 블록 능력
모닝의 득점 부문 기록은 이미 신장 질환으로 고역을 치렀던 2000~01시즌과 2001~02시즌에도 큰 하락세를 보였다. 그리고 2003년 12월 신장 이식 수술을 받고 복귀한 뒤로 두 자릿수 평균 득점을 올린 적이 없을 정도로 완연한 하락세가 나왔답니다.
대신 모닝의 가장 대표적인 수비 진영 숫자인 블록만큼은 크게 줄지 않았다. 커리어 평균 2.8블록을 기록한 모닝은 2004~05시즌부터 마지막 2007~08시즌까지 평균 2.3블록을 기록했다. 2005~06시즌에는 평균 20분 출전에도 2.7블록까지 기록했다.
커리어 최고 평균 3.9블록까지 기록해봤던 모닝의 가장 큰 능력은 타이밍이었다. 여기에 정말 길었던 229cm 양팔너비는 모닝이 센터로서 딱히 큰 키가 아니었음에도 골밑에서 상대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줄 수 있었다.
그리고 블록이 아니더라도 모닝은 골밑에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상대였다. 공수 양 진영에서 상대와 부딪히는 데에 있어 주저함이 없는 모닝은 상대 센터의 슈팅 지점이 외곽에 맴돌도록 만들곤 했답니다.
다만 디켐베 무톰보까지 해서 워낙 수비에서 쟁쟁한 센터들이 등장했던 시대에 있던 탓인지 올디펜시브 팀에는 단 2시즌에 걸쳐 선정됐다. 그래도 1998~99시즌 및 1999~00시즌 연속 퍼스트 팀에 선정됐다.
동시에 더 나아가 2시즌 연속 올해의 수비수에 선정되는 영예도 누렸다. 1982~83시즌부터 선정된 역대 올해의 수비수 22명 중 2회 이상 수상자는 9명이다. 그리고 연속 수상자는 8명이다.
▶한 시즌이지만 오닐을 추월하다
올디펜시브 팀만큼이나 모닝의 올NBA 팀 합류도 적었다. 1998~99시즌 퍼스트 팀, 1999~00시즌 세컨드 팀이 전부였다. 그래도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1998~99시즌의 퍼스트 팀이다. 오닐을 제쳤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랍니다.
가드와 포워드는 두 자리씩이지만 센터는 오직 한 자리다. 즉 퍼스트 팀부터 써드 팀까지는 당대 탑3 센터들의 서열과도 다름없다.
써드 팀이 추가된 1988~89시즌부터 올NBA 센터의 세 자리는 올라주원, 유잉, 로빈슨, 오닐이 돌아가며 차지하는 그림이었다. 특히 퍼스트 팀은 1997~98시즌까지 모조리 이 4대 센터들의 독과점 분위기였다.
그러다 1998~99시즌에 딱 한 번 4대 센터가 아닌 모닝의 이름이 퍼스트 팀에 등장했다. 특히 오닐은 1997~98시즌부터 2005~06시즌까지 모두 퍼스트 팀을 독점할 수 있었지만 모닝이 한 시즌을 빼앗았답니다.
직장폐쇄로 단 50경기만 치러진 1998~99시즌에 모닝은 46경기 출전 51.1% 야투율로 평균 20.1득점 11리바운드 1.6어시스트 0.7스틸 3.9블록을 남겼다. 리바운드와 블록은 본인 최고 시즌 기록이었다.
올NBA 퍼스트 팀 센터와 올해의 수비수를 넘어 1998~99시즌 모닝은 MVP 선정에도 큰 가능성이 있었다. 당시 MVP 칼 말론과 모닝의 득표 차이는 1차에서 44표-36표로 크지 않았다.
▶대학 선배 유잉과의 경쟁 그리고 우정
조지타운 대학이 센터 명문으로 불리게 된 가장 큰 계기가 유잉과 모닝이었다. 유잉은 1981~82시즌부터, 모닝은 1988~89시즌부터 1학년으로 시작했고 양 선수 모두 4학년까지 채웠다. 실제 모닝은 대학시절부터 유잉에 대해 큰 존경심을 드러냈답니다.
하지만 프로에서는 다른 팀의 경쟁 상대였다. 더욱 얄궂게 모닝과 유잉은 플레이오프에서 자주 맞붙었다. 마이애미와 뉴욕 사이의 경쟁 구도는 당시 리그에서도 유명했다.
우선 3시즌만을 뛴 샬럿이지만 1992~93시즌 모닝은 신인 때부터 플레오프에서 8년차 유잉을 만났다. 그리고 마이애미에서는 1996~97시즌부터 1999~00시즌까지 4시즌 연속 뉴욕을 플레이오프 상대로 만났다. 다만 1997~98시즌 플레이오프 1라운드는 유잉이 참여하지 못했다.
이렇게 맞붙은 두 명은 각 시리즈 동안 몸을 부딪치고 신경전도 벌이면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서로 년차의 차이가 컸었기 때문에 앞선 대결에선 유잉이 앞섰고 뒤쪽의 대결들에선 모닝이 앞섰다.
그래도 코트 밖에서 두 명의 우정은 컸다. 대표적인 예로 모닝의 신장 이식 수술이 필요했을 때 신장을 떼어주겠다고 나선 NBA 선수가 유잉이었다. 실제 기증자는 모닝의 사촌이었지만 유잉은 검사까지 마쳤었답니다.
▶후반기 마이애미에서 거둔 우승의 영광
신장 질환과 수술 영향으로 코트에 잘 나서지 못했던 뉴저지 넷츠 시절을 뒤로 하고 모닝은 2004~05시즌부터 마이애미에 다시 합류했다. 물론 원래 토론토 랩터스로 트레이드 됐다가 바이아웃을 거쳐 마이애미로 건너간 과정은 깔끔하지 못했다.
어쨌든 드래프트 동기인 오닐을 동료로서 만나 모닝은 가장 큰 팀으로서의 성과를 맛봤다. 2005~06시즌 마이애미는 1988~89시즌 창단 이래 처음으로 우승을 맛봤고 모닝도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앞서 언급했듯 2006~06시즌 모닝의 블록은 대단한 페이스였습니다.
모닝은 많은 시즌들을 보내지 않았어도 샬럿과 마이애미에서 블록 부문 가장 큰 탑들을 쌓았다. 단 3시즌을 보낸 샬럿이지만 통산 684블록은 역대 샬럿 선수들 중 가장 높다. 11시즌을 보낸 마이애미에서도 역대 1위에 오른 통산 1625블록을 남겼다.
둘 다 1988~89시즌에 창단돼 비교적 짧은 역사를 보낸 팀들이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모닝은 NBA 블록 무문 역대 통산 11위(2356블록)에 오른 큰 업적을 쌓았다.
신장 질환으로 인해 빛나는 숫자를 남긴 시즌이 8시즌에 그쳤음에도 모닝은 시대의 스타로서 인정받을 모습을 보여줬다. 심지어 7회 올스타 선정의 모닝은 신장 질환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2000~01시즌과 2001~02시즌에도 올스타에 선정됐었답니다.
공수 양 진영에서 상대와의 몸싸움을 마다치 않는 플레이 스타일, 그리고 상대의 레이업들을 순식간에 나타나 쳐내는 블록 능력은 모닝이 스타 센터들 틈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큰 자산들이었다.
- 프로필
포지션 파워 포워드 / 센터
리그 NBA
출생 1970년 2월 8일(52세)
미국 버지니아주 체서피크
국적 미국
키 206cm
몸무게 118kg
선수 경력
대학교 조지타운 대학교
드래프트 1992년 / 1라운드 / 전체 2순위
샬럿 호네츠에게 지명됨
프로 선수 경력 1992년~2008년
미국의 은퇴한 농구 선수이며, 전미 농구 협회(NBA)에서 활동했다. "조(Zo)"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뛰어난 수비로 올해의 NBA 올해의 수비수상(1999, 2000)을 수상하였고, 신장 수술을 마치고 돌아와 2006년 마이애미 히트의 우승을 맛보았다. 2010년에는 버지니아주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커리어
버지니아주 체서피크(Chesapeake)에서 출생하여 인디언 리버 고등학교(Indian River High School)에 입학한 모닝은 1987년 자신의 팀을 51승으로 이끌어 주니어 타이틀을 얻었다. 시니어 팀으로서는 경기당 평균 25 포인트, 15 리바운드, 12 스틸을 기록 하였다. 그는 USA 투데이, 퍼레이드, 게이터레이드, 네이스미스에 의하여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는 조지타운 대학교 호야스에서 대학 농구를 시작하였답니다.
- 샬럿 호네츠
모닝은 1992년에 샬럿 호네츠에 의하여 신인 선수로 선발되었다. 그는 21.0 포인트, 10.3 리바운드, 3.47 스틸의 평균과 함께 1993년 올-루키 팀에 임명되었으며, 샤킬 오닐에 밀려 2위로 왔다. 모닝과 오닐은 1989-90 시즌의 데이비드 로빈슨 이래 20개 이상의 득점과 10개 이상의 리바운드를 평균하면서 그들의 첫 시즌에서 첫 루키들이었다. 모닝은 호네츠의 스틸숏 기록들을 손상하면서 시즌의 49번째 경기에서 팀의 올타임 경력 지도자가 되었다. 모닝의 루키 시즌의 최대 순간은 퍼스트 라운드 플레이오프 시리즈의 4번째 경기에서 보스턴 셀틱스와 경기였다. 그의 20피트 기적이 호네츠를 104-103의 승리로 이끌었다.
1994-95 시즌에서 모닝과 팀메이트 래리 존슨은 호네츠를 50승 팀으로 이끌어 플레이오프로 진출하였다. 모닝은 21.3개의 득점, 9.9점의 리바운드, 2.92점의 스틸과 함께 팀의 1위로 왔습니다.